원로목사 이경준목사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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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신나는 일

다운교회 0 346
지난 주 수요일 저녁예배 시간에는 새로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영감 있는 예배 분위기였습니다. 그 동안 세 주에 걸쳐 수양회 주강사로 섬기느라고 수요 예배를 세 차례 빠지고 오랜만에 성도들과 함께 한 예배 시간이었습니다. 전에 이어서 마가복음을 본문으로 하여 계속 말씀을 나누었고,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순서였습니다. 전에는 찬송과 기도시간을 먼저 가진 후에 말씀을 나누었는데, 이번에는 말씀을 먼저 나누고 찬송과 기도시간을 가졌습니다. 찬송과 기도시간을 충분히 가지기 위해서 순서를 바꾼 것입니다. 전에는 준비(?) 찬송을 하였다면, 이번에는 준비(?) 설교를 한 셈이지요. 물론 찬송이든 설교든 준비라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찬송이든 설교든 모든 것이 이미 예배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날 제가 나눈 말씀은 ‘어려움에 있을 때 도우시는 주님’이 제목이었습니다. 저는 말씀을 전하거나 강의를 하려고 대중 앞에 서기 전에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것을 수줍음이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설교나 강의를 마치고 난 다음에는 스스로 평가를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것을 완벽주의 성향 때문이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나누면서 그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수줍음뿐만 아니라 주님께 온전히 맡기지 못하는 성품이 다분히 포함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완벽주의뿐만 아니라 제가 더 잘난 사람일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섞여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둘 다 잘못된 태도입니다.

말씀을 나눈 후에 함께 기도시간을 갖는 중에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저절로 회개의 눈물이 나오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사람들을 우리 교회에 많이 보내주시고 함께 영감 있는 예배를 드리게 해주신 것을 생각하니 얼마나 감사하고 기뻤는지요. 백세 된 아브람에게 아들을 주신다고 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웃었던 아브람의 심정이 생각이 났습니다. 한편으로 어이가 없는 웃음이기도 했겠지만, 그대로 되기만 한다면 신나는 웃음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저도 기도하다 말고 저도 모르게 너무 기뻐서 웃었습니다. 첫째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둘째 신나는 일은, 각 부서의 방이 좁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입니다. 실제로 작년 성탄절 연합 예배를 드릴 때에 앉을 자리가 모자라는 모습을 본 이후에 계속 죄송스러운 마음이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사실 이런 고민은 행복한 고민입니다. 교회 엘리베이터 앞에서 아이들이 축구공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볼 때 역시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지요. 학생들이 탁구대를 다른 층으로 밀고 갈 때에도 그 기분을 느낍니다. 어쨌든 이런 고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러면서 생각이 드는 것이 있습니다. ‘이제 넓은 장막터를 주실 때가 되었나?’ 하는 생각입니다. 아무튼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실제로 교회는 사람이지 건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건물은 단순히 교회된 성도들이 모이는 장소요 건물일 따름입니다. 성령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성령의 전이요, 그들이 모인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머리되시는 주님이 한 분이시요, 우리는 그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된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서로 간에 친밀한 교제를 현실적인 삶의 영역에서 도움을 받으며, 또한 왕성한 영적 교제도 나눌 수 있는 구역모임을 발전시켜 나가실 것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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